2008. 12. 18.

2008.12.18.꿈

결혼을 앞둔 신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행사가 있었는지 남편될 사람 친구라는데 그 둘 부부와 그 사람들의 아이셋과 한방에 있었다. 남자는 안경을 쓰고 배가 나왔고 두건을 쓰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비쩍 마르고 건조한 머리를 그저 한웅큼 쥐어 묶은 전형적인 아이들에게 치이는 가정주부같은 모습이었다.



남편이 될 사람이 왔다. 다부지진 못했지만 키가 컸고 아기들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람이라서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조금 긴 머리에 남은 염색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내일은 미용실에 가자고 말을 하며 안겼다. 친구부부와 우리는 잠시 아이들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때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기한을 알수가 없었다. 4~5년 후에 건강이 나빠져서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같다. 그런데 남편이 될 사람이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저 부부의 대리모를 해주고 죽어라 한다. 한참이나 멍한 머리를 다스리지 못해 울어야 했다. 울다 울다가 그렇다면 나는 우리 아이를 두명을 낳고 저 사람들의 대리모를 해주겠노라고 했다. 남편이 될 사람은 그건 좋지 못한 방법이라고 했다. 내 흔적이 남는 세상은 바라지 않는 다고 했다. 자신 혼자 남아 어떻게 우리 아이를 키우냐고, 사실 이 결혼조차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그 사람눈이 너무나도 차가와 어떻게 말을 할수가 없었다. 어차피 죽을 몸이라 그렇다면 나는 이 사람들의 대리모를 해주라는 부탁을 왜 들어줘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을 했다. 나보고 이기적인 여자라고 말을 했다. 내가 손을 붙잡고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사랑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같았다. 친구의 아기 중 딸아이가 내게 안겼다. 엄마를 닮아 다섯살무렵인것같아 보이는데도 말랐다. 양갈래로 묶은 아이의 머리카락은 엄마의 그것과는 다르게 보드라웠다. 아이를 꼭 안으니 아이 특유의 젖내가 났다. 아이를 붙들고 울으니 아이가 울지 말라고 눈을 만져주었다.



그렇게 아이가 좋으면 하나 낳아주지 그러냐고 남편이 될 사람이 말한다. 아니, 이제는 남편이 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에게 모진 소리를 못하는 나였다. 아이의 눈은 까맣고 피부는 여렸다. 아이를 방에 내려놓고 그 방에서 나와버렸다.

2008. 5. 4.

(Movie)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2005.11.10  107분  미국
감독 미셸 공드리




clementine

조엘, 삭제기술자들이 곧 여기 올거야.

그러니까 다른 곳으로 날 데려가는 건 어때?

내가 속하지 않았던 그런 곳 말이야.

그리고 아침까지 거기 숨어있는 거야.

joel

-난 너 없는 곳은 기억이 나질않아.




가끔은 그게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조차 헷갈리는 때가 있어. 그때가 언제였지? 그런일이 있었나.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이었나? 이런 생각들과 함께 밀려드는 기억의 잔상들. 언제였는지 모르는 걸까. 아니, 이제 더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거야. '망각', 잊어버린 것은 저 멀리 사라져 없어지는 거지. 너와 나는 언제나 불안정함 가운데에서 기우뚱댔지. 그와중에 나는 안녕을 꿈꿨고, 아마도 너는 탈출을 꿈꿨던 것같아.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꿈꾸는 너와, 다른 어딘가가 아닌 여기 이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내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것은 오히려 기적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르지. 아주 사소한 단어하나가 귓가에 맴돌거나, 분명 지난주에 있었던 일이 까마득하게 먼 날이었던 것같기도 해. 아마도 한참이나 지난후에는 그저 이십대의 어느 기억으로 이 순간들을 기억하겠지. 아무것도 남지 않는 두 손바닥위엔, 추억이 적힌 얇은 다이어리가 놓여있어. 이걸, 오늘은 버릴 거야.

그렇지만  역시 너를 잊어버리는 건 참 어려울 것같아. 아직도 가끔은 네가 궁금해. 그저 스쳐간 사람에 대한 기억일까? 아마도 나는 아직도 내가 지은 이 집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웅얼대고 있는데, 너는 어떨까. 그아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와 함께 할 수 있었던 미래를 생각하면 여전히 캄캄해. 분명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절망에 울었던 날들이 있었지. 그건 각인이 되어 너를 생각하면 나는 순간 아득한 절벽에서 밀려 떨어진 것처럼 후욱-하고 허공을 나는 듯해. 끝도 없는 저 밑으로 떨어지는. 아주 무섭고, 아주 두렵지. 그때 내사랑을 집착이라고 말한다 해도 나는 할말이 없었지. 이렇게나 먼 시간을 지나쳐왔지만, 아직 나는 그때의 어두운 꿈을 가끔 꾸곤해.

한강변을 걸었어. 캄캄한 밤이라 온통 노란 가로등 불빛으로 덮혀진 붉으면서도 노란 세상들이었지만, 그래도 풀들은 잘 자라고 있고 공기도 많이 따듯해졌어. 오래전, 나는 이길을 너를 생각하며 울었지. 그래, 전화를 하면서도 받지 않을땐, 그애와 함께 있구나 하며 섭섭했지. 차고 지는 달을 아마도 그렇게 편안하게 만날 수 있을 때가 다시 올수 있을까. 두시간, 혹은 세시간에 걸친 달과의 산책, 가끔은 입꼬리가 올라간 웃음을, 가끔은 한가득 볼에 무언가를 넣은듯 부풀은 달. 캄캄하고 깊은 밤하늘에 덩그라니 떠있었고 나는 강둑에 기대앉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내 기억속에 있는 추위와 내 기억속에 있는 상처를 모두 밤하늘에 쏟아내버리고 그저 훅-하고 사라져버리고 싶었지. 귓등으로 세찬 바퀴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싸이클자전거 소리가 지나가고, 간간히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 같은 걸 들었어. 그리고 등돌린 채로 한참이나 울먹였어.

아마도 그때였을거야. 마음 한가득 차던 눈물을 참지 못해 터뜨려 버렸을 때가. 아니,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마음 한구석에 숨겨버릴 때가. 두번째로 네게 말하던 날이었어. 나는 우리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덮어버리고 싶었어. 마치 눈을 가리면 세상이 사라져버린다고 믿는 아기들처럼, 그저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면 그게 사라지는 걸로 믿고싶었던 거야. 끔찍한 시간이 될거라는 걸 알면서, 정말 가시밭길일게 분명한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꾹꾹 발끝과 발 뒤꿈치로 눌러밟으며 걷기로 했었어. 그리고 얼마 후엔 난생처음으로 내 스스로 이별을 하는 것을 지켜볼수 있었어. 이렇게 아플바에야, 이렇게 힘들바에야..하면서 조금씩 포기를 해나갔던 거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울면서 헤어지자고 말했어. 이내 번복하고 또 번복하고 하면서, 나는 그렇게 힘들게 이별이란 걸 했어. 일방적인 통보는 내게 이별이 아니었으니까. 내 스스로 한 이별은 그게 처음이었어.

바람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자전거를 타는 날들이 많아졌고 이내 나는 괜찮아지기 시작했지. 스트레스 때문에 먹지 못하던 밥을 다시 먹을 수 있었고, 조금씩 조금씩 덜 아프기 시작했어. 군더더기 없이 행복한 날들. 오히려 혼자 인게 편했던 건 아마도 지나치게 둘이었을 때가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매일 오래전에 좋아하던 가요나, 오래된 팝송을 듣고 하는 동네 산책에 나는 행복했어. 그나마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던 때는 그때였을 거야. 혼자인 것이 그래도 낯설을 때였으니.

되돌릴 수가 없었어. 입안 가득히 깔끄러운 그런 시간들로 기억되는 과거들. 다시 되돌려보려해도 재생되지 않는 기억들, 이미 오류로 가득한 머릿속은 아름답고 순수한 날들로 나를 돌려보낼 수가 없었어. 미친 듯이 갈증에 쉽싸여 눈물을 마시던 시간, 아픔을 견뎌내기 위해 또다른 상처를 내던 시간. 남을 사랑하기 위해 내게 상처내던 시간들. 그런 일을 다시 내게 하고 싶지 않아.

엊그제 나는 꿈을 꿨어. 내가 손에 쥔 무언가로 단단한 알을 깼지. 알에선 한가득 뭉개진 검붉은 액체들과 그리고 투명하고 진득한 액체들이 한데 뒤섞여 흘러나왔어. 깨진 알을 뒤로 한채 걸었갔어. 하늘은 너무나도 파랗고 구름 하나 걸려있지 않았어. 그저 새파란 하늘과 샛노란 태양, 아주 큰 태양을 보았어. 나는 눈이 부셔 눈을 손으로 가렸다가 울었어. 아주아주 기쁘고 아주아주 행복했었던 것같아. 잠에서 깨어났을 땐, 한낮이었지. 그리고 단한번도 놓은 적 없던 무언가를 놓아버린 느낌이었어.

얼마나 멀리 떠나온걸까. 그때의 기억들은 모두 삭제되었거나 지워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어. 그 시간들은 가끔 가깝게 다가왔다가 훌쩍 멀리 떨어져가. 난 여전히 네가 좋아하던 것을 가끔 기억해. 그러나 절망속에서도 가끔은 풍요롭던 나날들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테니, 이제 웃어도 되지 않을까. 언젠가 내가 큰 사람이 되어서, 그러니까 아주 마음이 큰 사람들. 내 마음에 누군가를 담고 내 아이들을 담고나서, 우연히 너를 만나면 그렇게 말하고 싶어. - 고마워, 나는 그래도 살아있어. 이렇게나 잘.

여전히 나는 이곳에 서있고, 이곳에서 살고, 이 시간들을 보내. 기억을 또다른 기억으로 덮어가면서 한발자국씩 나름 고민해가며 딛어가며. 함께 하던 누군가는 없어졌지만, 그 배경은 그대로 남아있어. 그 배경조차도 조금씩 얼굴을 바꾸어가며 내게 인사를 하지. 내가 언젠가 이곳을 떠날때까지 조금씩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며 새침한 척 하겠지. 그렇게 내게 있어 사랑은 가도 기억은 남는데,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잊지못할 사랑을 찾아 지워진 기억마저도 거슬러. 그래, 그건 그들의 이야기니까 그런거야.

2008. 3. 14.

2008.03.14.

세상에는 되돌릴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게 몇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아마도 지나가버린 시간이 아닐까싶었다. 각자 입맛에 맞게 퇴색하면서 각색된 기억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안고선 그 시간을 몹시도 그리워하곤 한다. 그리고 때때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란 결코 그 단꿈과는 같을 수 없는 현실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아침부터 꾸물꾸물하던 하늘은, 오후가 되자 빗방울을 한방울씩 떨구더니 이내 가랑비같은 힘없는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날씨마저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궁시렁댔다. 차가운 빗방울은 운동화도, 까만 바지도 모두 적셔버려서 약속장소였던 카페에서 한참이나 앉아있어야 했다. 온풍기의 텁텁한 공기만큼이나 무거운 분위기가 생각난다. 괜히, 만나자는 약속에 응해버렸다고 후회했었다. 애써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떼어내 농담이라던가 고만고만한 이야기를 던졌지만 어디론가 매번 사라져버리고 만다.

빨간 우산을 쓴 아가씨도, 까만 장우산을 쓴 아저씨도, 건물앞 유리창이 있는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물기를 털어낸다. 창바로 앞에 앉은 탓에 막혀버린 시야가 조금 답답해져왔다. 가게 앞의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는 이미 사람으로 그득해진지 오래였고, 그런 일상스럽지만 자주 볼 수 없는 광경들을 보면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추억들을 생각하는 우리들이 있었다.

카페에 틀어진 가요는, 나는 사랑에 미쳤고 그래서 너는 지쳤다는 식의 식상한 가사를 반복해서 내뱉었다. 그러나 그 식상한 가요때문에 너덜너덜하게 헤어져 다시 꿰멜 수도 없는 조각들로 마음들이 나뉘던 그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정지되버린 듯한 공간 속에 있는 듯하기만해서 슬슬 벗어나야 된다는 경보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져왔다. 약속이 있어, 가봐야 할 것같아요. 라는 말은 내 입에서 그닥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기어나온 것같다. 강남역에서 홍대역까지 약 40분되는 거리를 바래다 준다며 어설픈 친절함을 선보이는 당신. 여전히 변하지 않은 눈치없는 그 모습이 참 재미있었다.

화이트데이라며 선물받은 쉬폰케익위에 올라간 딸기는 참 달콤했고 가운데의 커스터드 크림도 아주 맛이 있었지만, 케익을 먹으면서 입안 한 구석은 껄끄럽기 짝이 없었다. 아마도 기분탓일까. 하루종일 그닥 나쁜일도 없었으면서 계속 무언가 망가진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상한 기분이었다.

2008. 2. 1.

2008.02.01. 꿈

작은 카페의 카운터 뒤에 서있었다. 14평, 혹은 그보다 더 작을 지도 모른다. 작은 테이블 3개, 4인용 테이블 1개, 그리고 바깥쪽 테이블 2개, 바에 3자리가 있는 카페였다. 내가 좋아하는 온화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이제막 오픈하는 분위기. 정리를 모두 하고 나서 손님들이 들어오고 티포트를 데우고, 드립커피를 내리고 하는 온곤한 하루. 손님들 중엔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엄마도 있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내외분도 있었고, 책을 읽으러온 젊은 아가씨도 있었다. 저녁무렵엔 간단한 맥주와 와인을 팔기 시작했다. 흡연이 되는 자리는 야외뿐이라서 조금 쌀쌀한 날씨라서 담요를 준비하고 촛불이 담긴 램프를 바깥에 내놓았다. 조금 크게 음악을 틀어도 괜찮을까? 조용한 동네라서 음악을 트는 것도 조금 조심스럽다. 밤 11시부터 주문을 받지 않았고, 12시 마감을 시작한다. 바쪽에 앉은 풀죽은 친구와 함께 이야기도 하기 위해 조금 일찍 끝냈다. 카운터 뒤의 쪽문을 열어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내 방이었다. 작은 다락방이지만 창도 있었고 책이 많았다. 작은 소파하나와 테이블, 그리고 침대가 있었고 작은 서랍과 벽가득한 책장.


조금더 시간이 지난 것같았다.

자고 일어났는데, 내 옆엔 똘망한 눈을 가진 계집아이하나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다섯살? 네살? 눈을 떠보니 어느덧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아이 밥을 차려주고, 옷을 입히고 손을 잡고선 가게로 간다. 오늘 아이가 읽을 동화책을 가방에 넣어주고, 어제 장을 봐놓은 장바구니도 들고선. 어린이방이 오늘 쉬는 날이기 때문에 남편이 퇴근할 저녁때까진 내가 데리고 있어야 한다. 아이는 가게에 가는 걸 꽤나 좋아하는 듯했다. 손님들이 오면서 아이를 반가와하고, 여느때와 같은 시간을 보냈다. 저녁무렵 아이를 데리러 온 남편에게 아이를 보내고나서 내일 놀러갈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고나서 가게에서 잠시 졸고나서 눈을 떴는데, 집이었다.

2008. 1. 31.

2008.01.31. 분홍금빛 구름, 제이미 올리버.

분홍금빛으로 빛나는 구름을 보았고, 해가 지고 있었다. 구름을 투과한 빛이 조금씩 줄어드는 시간, 오후 다섯시. 어서빨리 해가 긴 봄과 여름이 왔으면 한다. 낮이 길다는 것은 우울한 밤이 짧아진다는 이야기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두어개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너무 많은 것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고, 기분은 급속도로 차갑게 굳기 시작했다. 다정한 김동률의 목소리로도 위안이 되지 못할만큼.


버스를 탔고, 분홍금빛으로 빛나는 구름을 보았고, 해가 지고 있었다. 따뜻한 온풍기로 데워진 공기는 버스의 문이 열리고 닫힐때마다 한덩어리씩 빠져나가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볼의 혈관이 활짝 열려 발갛게 달궈지고 있었다. 화끈거리는 볼을 차가운 손으로 부비적거리면서 천천히 해가 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다향기가 났다. 익숙한 향기, 그의 향수. 향기는 오래전의 기억주머니를 툭-하고 무심히 터뜨렸다. 마구 쑤셔넣어 봉해버렸던 기억의 뭉치들이 주머니를 빠져나와 어수선하게 흩어져버린다. 불어 동사변형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이렇게 끝까지 남는 기억은 잔인하다.

하차벨을 눌렀고, 버스에서 내렸고, 분홍금빛으로 빛나는 구름은 차가운 푸른 빛으로 변해버렸고 저끝부턴 새파랗다못해 남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짧은 머리카락을 사방팔방으로 날려버리는 차가운 바람때문에 머리카락을 붙잡고 몸을 잔뜩 움츠린채 걸어야 했다. 걷다가 문득 욕심이 많이 나서 어찌 할 줄 몰랐던 오래전이 생각났다. 활짝 열린 혈관속을 세차게 흐르던 내 피만큼, 모든 것을 힘있게 움켜쥐고 싶었던 그 시간들. 그는 누구나 어느정도 시간을 보낸 후라면 그런 경험 하나쯤은 갖게 된다고 그랬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누구나 견뎌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점으로 들어섰다.

제이미올리버의 원서가 중고로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갔었다. 생각보다 책의 상태는 말끔했고, 기분좋게 돈과 책을 맞바꾼다. 이제 내겐 제이미올리버가 쓴 책이 두권이다. 표지에 있는 그의 분홍색 볼이 마음에 꼭 든다. 그는 훌륭한 요리사이자, 좋은 남편이고, 다정한 아빠일거야.라고 생각했다. 상상은 내 영역이라 진실이 무엇이던지 상관이 없었다. 곁에 있던 게이샤의 추억 원서도 집어든다. 그냥 가져가라는 말에 홀랑 가방에 넣는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챕터 2까지 읽어내려간다. 목소리는 나긋하고 강인하다. 원서를 읽을 때 느끼는 이 투명함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듣는 것보단,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직접 듣는 것이 오해가 없다.

그의 마음도, 내 마음도 그렇게 온전히 전해질 수 있었다면 지금 외롭지 않게 될 수 있었을까? 대답 할 수 없는 질문이 또 시작됬다.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와 그의 말투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싶었는데, 오히려 턱 막히고 만다. 성숙하지 못한 낯선 얼굴이 버스의 창문에 비친다. 언제나 낯선 내 얼굴. 언제쯤 친해질수 있을까.

2008. 1. 7.

2008.01.07 단호박죽.

재료 : 단호박 1통, 팥 반컵, 현미찹쌀 반컵, 찹쌀가루 3숟갈, 소금 조금




먹고 싶은 게 생길 때 가끔은 다음에 먹지 뭐-라고 생각하고선 넘어가곤했다.
그러고 나면 짧게는 몇개월 길게는 몇년동안 먹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스무살에 먹고싶었던 오므라이스를 스물세살이 되어서야 먹었던 것처럼.

오늘은 죽이 먹고싶었다.
날이 많이 풀린듯하지만 사실 습진 공기때문에 더 싸늘해서 따듯한 온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찬찬히 끓여서 혀의 근육이 살짝 누르기만 해도 뭉그러지는 곡식의 질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회색의 날엔 잔잔한 영화를 틀어놓고 요리를 해야한다. 사람들수는 많지 않지만 대화가 많은 수다스러운 영화를. 고르고 골라 쥴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비포선라이즈를 틀고나서 싱크대 앞에 선다.

단호박은 꼭다리를 따고 반을 갈라놓는다.
숟가락으로 속을 삭삭 긁어내고 겉껍질을 벗겨내고 작게 잘라놓는다.

미리 콩들을 불려놓지 못했으니 팥과 현미찹쌀은 전기압력밥솥으로 일단 쪄보기로 했다.
고사이에 쥴리델피의 변하지 않은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도 한번 하고, 단호박 껍질도 모아 버린다.

팥과 현미찹쌀밥이 다 되면 냄비로 옮기고 물을 붓고 끓인다. 어쨋거나 죽은 곡식들이 연약해야 죽답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요렇게 끓이면 팥물때문에 죽 색이 곱게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맛은 있지만 어쩐지 무서운 색이 되어버리는 호박팥죽이랄까. 차라리 껍질을 제거한 녹두와 끓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다.

어느정도 밥이 끓고나면 호박을 넣고 끓이고 어느정도 무르면 주걱으로 부서준다. 조금 힘들긴 하지만 너무 고운 죽보다는 재미있는 맛이 나서 좋다. 다 부수고 나면 꼭 호박범벅처럼 여기저기 팥이 물러서 터진것들과 덜 무른 현미쌀같은 것들이 군데군데 남은 죽이 된다. 여기서 좀더 끈적해지면 더 맛있을 것같아서 찹쌀 가루를 흩뿌려서 섞는다. 푹-푹-하면서 죽이 끓는 소리가 재미있다.

그릇으로 옮겨담고 나니, 이건 영락없는 할머니표 죽이다.
이십대 처자가 끓인 할머니스러운 시골 호박죽.
매력적인 쥴리 델피와 발랄하면서 신경질적인 에단 호크를 마주하고 함께 한끼 식사.

디저트는 말린 서양자두라는 프룬 4개.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