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31.

2008.01.31. 분홍금빛 구름, 제이미 올리버.

분홍금빛으로 빛나는 구름을 보았고, 해가 지고 있었다. 구름을 투과한 빛이 조금씩 줄어드는 시간, 오후 다섯시. 어서빨리 해가 긴 봄과 여름이 왔으면 한다. 낮이 길다는 것은 우울한 밤이 짧아진다는 이야기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두어개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너무 많은 것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고, 기분은 급속도로 차갑게 굳기 시작했다. 다정한 김동률의 목소리로도 위안이 되지 못할만큼.


버스를 탔고, 분홍금빛으로 빛나는 구름을 보았고, 해가 지고 있었다. 따뜻한 온풍기로 데워진 공기는 버스의 문이 열리고 닫힐때마다 한덩어리씩 빠져나가고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볼의 혈관이 활짝 열려 발갛게 달궈지고 있었다. 화끈거리는 볼을 차가운 손으로 부비적거리면서 천천히 해가 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다향기가 났다. 익숙한 향기, 그의 향수. 향기는 오래전의 기억주머니를 툭-하고 무심히 터뜨렸다. 마구 쑤셔넣어 봉해버렸던 기억의 뭉치들이 주머니를 빠져나와 어수선하게 흩어져버린다. 불어 동사변형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서, 이렇게 끝까지 남는 기억은 잔인하다.

하차벨을 눌렀고, 버스에서 내렸고, 분홍금빛으로 빛나는 구름은 차가운 푸른 빛으로 변해버렸고 저끝부턴 새파랗다못해 남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짧은 머리카락을 사방팔방으로 날려버리는 차가운 바람때문에 머리카락을 붙잡고 몸을 잔뜩 움츠린채 걸어야 했다. 걷다가 문득 욕심이 많이 나서 어찌 할 줄 몰랐던 오래전이 생각났다. 활짝 열린 혈관속을 세차게 흐르던 내 피만큼, 모든 것을 힘있게 움켜쥐고 싶었던 그 시간들. 그는 누구나 어느정도 시간을 보낸 후라면 그런 경험 하나쯤은 갖게 된다고 그랬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누구나 견뎌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점으로 들어섰다.

제이미올리버의 원서가 중고로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갔었다. 생각보다 책의 상태는 말끔했고, 기분좋게 돈과 책을 맞바꾼다. 이제 내겐 제이미올리버가 쓴 책이 두권이다. 표지에 있는 그의 분홍색 볼이 마음에 꼭 든다. 그는 훌륭한 요리사이자, 좋은 남편이고, 다정한 아빠일거야.라고 생각했다. 상상은 내 영역이라 진실이 무엇이던지 상관이 없었다. 곁에 있던 게이샤의 추억 원서도 집어든다. 그냥 가져가라는 말에 홀랑 가방에 넣는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챕터 2까지 읽어내려간다. 목소리는 나긋하고 강인하다. 원서를 읽을 때 느끼는 이 투명함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듣는 것보단,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직접 듣는 것이 오해가 없다.

그의 마음도, 내 마음도 그렇게 온전히 전해질 수 있었다면 지금 외롭지 않게 될 수 있었을까? 대답 할 수 없는 질문이 또 시작됬다. 그녀의 회색빛 눈동자와 그의 말투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싶었는데, 오히려 턱 막히고 만다. 성숙하지 못한 낯선 얼굴이 버스의 창문에 비친다. 언제나 낯선 내 얼굴. 언제쯤 친해질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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