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지색 벌판이 있었다. 따뜻한 공기, 간간히 마른 풀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어오곤 했다. 베이지색, 아주 엷고 곱게 마른 풀들이 자리한 벌판 한가운데 길이 나 있었고 그 한가운데 내가 서있었다. 내가 나인지는 모르겠고 그저 맨발에 긴 머리였던 게 기억난다. 소녀스럽게도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에 소매는 손을 덮고도 한참이나 긴, 원피스형 잠옷을 입고 있었다. 저 멀리 길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단단한 나무가 서있다. 죽은 나무, 잎사귀는 하나도 없이 그저 덩치만 큰 검고 마른나무. 어서 가란 듯이 바람이 불때마다 사부작, 마른 나뭇가지가 소리를 냈다.
한 발짝 내딛자 바삭바삭한 마른 풀들이 기분좋게 부서졌다. 스스슥 하고 바스라진 잎사귀가 날아갔다. 그렇게 한발한발 천천히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너머에서 붉은 색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물들기 시작했다는게 더 맞는 표현일것 같다. 작게 팡, 팡, 팡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속도로 꽃이 피기 시작하면서 꽃이 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개양귀비, 빨갛고 빨간 그 꽃의 색깔. 온화한 노란빛의 벌판을 삽시간에 붉게 물들이는 그 꽃. 아름다우나 무섭기 시작했다. 이내 몇미터 되지 않는 공간까지 꽃들이 피어났고 내 주변 한팔 간격을 두고서 빙둘러 채워졌다. 오로지 내 주변 빼고 모든게 꽃 이었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뒤를 돌아봤다. 온통 빨간 꽃 천지인 그곳에서 내 검은 나무만 온전히 그 색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나무가 불타기 시작했다. 도와줄수가 없어, 아무도 없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 공간 자체가 정말 두려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화르륵 불타오르기 시작한 나무는 한참이나 타다가 서서히 옆으로 스러졌고 구우웅 하는 육중한 소리와 노랗고 투명한 불티를 날리면서 정말 없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나서 꽃들에게 불이 번지기 시작했고, 그 불들이 뜨겁고 뜨겁게 온 벌판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옷 앞자락들까지 불에 먹히려는 순간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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