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 : 단호박 1통, 팥 반컵, 현미찹쌀 반컵, 찹쌀가루 3숟갈, 소금 조금
먹고 싶은 게 생길 때 가끔은 다음에 먹지 뭐-라고 생각하고선 넘어가곤했다.
그러고 나면 짧게는 몇개월 길게는 몇년동안 먹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스무살에 먹고싶었던 오므라이스를 스물세살이 되어서야 먹었던 것처럼.
오늘은 죽이 먹고싶었다.
날이 많이 풀린듯하지만 사실 습진 공기때문에 더 싸늘해서 따듯한 온기가 필요하기도 했고,
찬찬히 끓여서 혀의 근육이 살짝 누르기만 해도 뭉그러지는 곡식의 질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회색의 날엔 잔잔한 영화를 틀어놓고 요리를 해야한다. 사람들수는 많지 않지만 대화가 많은 수다스러운 영화를. 고르고 골라 쥴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비포선라이즈를 틀고나서 싱크대 앞에 선다.
단호박은 꼭다리를 따고 반을 갈라놓는다.
숟가락으로 속을 삭삭 긁어내고 겉껍질을 벗겨내고 작게 잘라놓는다.
미리 콩들을 불려놓지 못했으니 팥과 현미찹쌀은 전기압력밥솥으로 일단 쪄보기로 했다.
고사이에 쥴리델피의 변하지 않은 얼굴을 바라보며 감탄도 한번 하고, 단호박 껍질도 모아 버린다.
팥과 현미찹쌀밥이 다 되면 냄비로 옮기고 물을 붓고 끓인다. 어쨋거나 죽은 곡식들이 연약해야 죽답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요렇게 끓이면 팥물때문에 죽 색이 곱게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맛은 있지만 어쩐지 무서운 색이 되어버리는 호박팥죽이랄까. 차라리 껍질을 제거한 녹두와 끓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같다.
어느정도 밥이 끓고나면 호박을 넣고 끓이고 어느정도 무르면 주걱으로 부서준다. 조금 힘들긴 하지만 너무 고운 죽보다는 재미있는 맛이 나서 좋다. 다 부수고 나면 꼭 호박범벅처럼 여기저기 팥이 물러서 터진것들과 덜 무른 현미쌀같은 것들이 군데군데 남은 죽이 된다. 여기서 좀더 끈적해지면 더 맛있을 것같아서 찹쌀 가루를 흩뿌려서 섞는다. 푹-푹-하면서 죽이 끓는 소리가 재미있다.
그릇으로 옮겨담고 나니, 이건 영락없는 할머니표 죽이다.
이십대 처자가 끓인 할머니스러운 시골 호박죽.
매력적인 쥴리 델피와 발랄하면서 신경질적인 에단 호크를 마주하고 함께 한끼 식사.
디저트는 말린 서양자두라는 프룬 4개.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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